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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과 유래

by idiom.dictionary 2023. 5. 23.

와신상담을 직역하면 '장작더미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장작더미에 누우면 등이 배겨 아프고 제대로 누워있기 힘들고, 아주 쓴 맛의 쓸개를 맛보는 것은 하기 싫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고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吳) 나라와 월(越) 나라의 전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날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자성어입니다. 와신상담의 유래와 뜻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膽
누울 (와) 섶 (신) 맛볼 (상) 쓸개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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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臥薪嘗膽-뜻과유래
와신상담-臥薪嘗膽-뜻과유래

 

와신상담의 유래

와신상담은 중국 역사서 史記(사기)의 세가(世家) 越王句踐世家(월왕구천세가) 편에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 중에 월왕 구천이 복수를 위해 자리에 쓸개를 두고 앉으나 누우나 쓸개를 올려보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았다는 구절에서 상담(嘗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만, 사기에는 월왕의 상담만 나오고 와신(臥薪)은 언급되지 않고, 나중에 지어진 십팔사략(十八史略)이라는 역사책에 이 이야기의 전체 내용이 언급됩니다. 십팔사략의 내용을 살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吳) 나라가 월(越) 나라를 공격하다가 오왕 합려가 부상당하여 죽고

아들인 부차가 왕위에 오르니 오자서는 다시 부차를 섬겼다.

부차는 복수에 뜻을 두고 아침저녁으로 섶나무(땔나무를 뜻함)에 누워 자면서(와신:臥薪)

출입하는 사람에게 호통치며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이 네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잊었는가?

 

주나라 경왕 26년에 부차가 월나라를 부초에서 패배시키니

월나라 왕 구천은 남은 병사와 회계산에 거처하면서

신하 되기를 청하고 아내는 첩이 되기를 청하니 오자서는 허락할 수 없다 하였고

태배 백비는 월나라에서 뇌물을 받고 부차에게 월나라를 용서할 것을 설득하였다.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가서 누울 자리에 슬개를 달아놓고

쓸개를 맛보며(상담:嘗膽) 말했다.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

나라의 모든 일은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함께 군사를 다스리며 오나라를 도모하는데 힘썼다.

 

태재 백비가 오자서에 대해 모함하기를 자신의 계책이 쓰이지 않아 임금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부차는 이에 자서에게 촉루라는 검을 하사하여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그의 가족에게 말하길 반드시 내 무덤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부차의 관을 만드시오.

내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매달아 주시오.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기 위함이오. 그리곤 자결하였다.

부차가 그의 시신을 가죽주머니에 담아 강에 던지니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강가의 언덕 위에 사당을 짓고 서산이라 이름 붙였다.

 

월나라는 십 년 동안 군사를 모으고 가르쳐

주나라 원왕 4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치니, 오나라는 세 번 싸워 세 번 다 패했다.

부차는 고소간에 올라 월나라에게 화친하기를 청하니 범려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부차는 내가 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하고는 얼굴 덮어 싸매고 죽었다.

 

 

 

와신상담의 뜻

와신(臥薪)에서 薪은 섶(신)이라고 하는데 섶은 땔나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땔나무를 베고 누우면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상담(嘗膽) 역시 쓸개를 맛보는 것으로 매우 쓰고 역겨운 일일 것입니다. 오(吳) 왕 부차와 월(越) 왕 구천이 잊지 않고 복수를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입니다.

 

목표를 잊지 않고 어려운 일을 계속해서 해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채찍질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고사에서는 복수가 목적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특히, 스포츠나 경제,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실패한 일을 다시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상황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와신상담과 비슷한 의미의 사자성어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를 갈며 속을 썩인다'는 뜻으로, 매우 분하여 복수심으로 이를 갈며 벼르는 모습을 의미함.

절치액완(切齒扼腕)
'이를 갈고 팔을 걷어 올린다'는 뜻으로, 매우 분하여 이를 갈고 팔을 걷어붙이며 벼르는 모습을 의미함.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온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실패한 후에 다시 그 일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함.

 

와신상담의 배경과 관련된 사자성어

오월동주(吳越同舟)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타고 있다'는 뜻으로,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원수들이라고 해도 서로 협력하게 됨을 의미하거나, 뜻이 다른 사람이 한 곳에 있게 된 상황을 의미함.

 

 

 

와신상담이 유래된 史記(사기) 세가(世家) 越王句踐世家(월왕구천세가)의 원문 구절

吳既赦越(오기사월) 越王句踐反國(월왕구천반국) 乃苦身焦思(내고신초사)
置膽於坐(치담어좌) 坐臥即仰膽(좌와즉앙담) 飲食亦嘗膽也(음식역상담야)
曰(왈) 女忘會稽之恥邪(여망회계지치야)
身自耕作(신자경작) 夫人自織(부인자직) 食不加肉(식불가육),
衣不重采(의부중채) 折節下賢人(절절하현인) 厚遇賓客(후우빈객),
振貧弔死(진탐조사) 與百姓同其勞(여백성동기로)

 

와신상담이 유래된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원문 구절

吳伐越(오벌월) 闔廬傷而死(합려상이사)

子夫差立(자부차입) 子胥復事之(자서부사지)
夫差志復讎(부차지복수) 朝夕臥薪中(조석와신중)

出入使人呼曰(출입사인호왈) 夫差而忘越人之殺而父邪(부차이망월인지살이부야)


周敬王二十六年(주경왕이십육년) 夫差敗越于夫椒(부차패월우부초)
越王句踐(월왕구천) 以餘兵棲會稽山(이여병서회계산)
請爲臣妻爲妾(청위신처위첩) 子胥言不可(자서언불가)
太宰伯嚭受越賂(태재백비수월뢰) 說夫差赦越(설부차사월)

句踐反國(구천반국) 懸膽於坐臥(현담어좌와)
卽仰膽嘗之曰(즉앙담상지왈) 女忘會稽之恥邪(여망회계지치야)
擧國政屬大夫種(거국정속대부종) 而與范蠡治兵(이여범려치병) 事謀吳(사모오)


太宰嚭譖子胥(대재비참자서) 恥謀不用怨望(치모불용원망)
夫差乃賜子胥屬鏤之劍(부차내사자서촉루지검)
子胥吿其家人曰(자서고기가인왈) 必樹吾墓檟(필수오묘가) 檟可材也(가가재야)
抉吾目懸東門(결오목현동문) 以觀越兵之滅吳(이관월병지멸오) 乃自剄(내자경)
夫差取其尸(부차취기시) 盛以鴟夷(성이치이) 投之江(투지강)
吳人憐之(오인연지) 立祠江上命曰胥山(입사강상명왈서산)


越十年生聚(월십년생취) 十年敎訓(십년교훈)
周元王四年(주원왕사년) 越伐吳(월벌오) 吳三戰三北(오삼전삼배)
夫差上姑蘇(부차상고소) 亦請成於越(역청성어월) 范蠡不可(범려불가)
夫差曰(부차왈) 吾無以見子胥(오무이견자서) 爲幎冒乃死(위멱모내사)

 

 

 

십팔사략(十八史略)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원(元)의 한족 학자 증선지가 지은 18권의 중국 정사 역사책을 요약하여 만든 역사책입니다. 원명은 '고금역대 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으로, 태고(太古) 때인 삼황오제부터 송나라 말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십팔사략에 기초가 된 역사서는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晉書)·송서·남제서·양서·진서(陳書)·후위서·북제서·후주서(後周書)·수서·남사·북사·당서·오대사·송감 등의 중국의 정사 18종입니다. 2000년이 넘는 기간을 다루고 있어 중국사의 기본적인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사기(史記)

사기(史記)는  중국 전한 시대의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라는 사람이 저술한 역사서로, 중국 역대 대표 역사서 24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역사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기(史記)는 역사적 사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가 아닌, 각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기술하는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또한 사기는 역사서로서의 완성도는 물론 뛰어난 문장으로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중국 상고 시대의 황제 오제부터 한무제까지 제왕의 역사를 기록한 12본기(本紀),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10표(表), 예법, 음악, 병법과 군사, 역법, 천문, 종묘나 제사, 치수, 경제를 기록한 8서(書), 춘추전국시대의 유명 제후들과 전한의 황족, 제후들과 고관들을 기록한 30세가(世家), 천하에 공명을 떨친 인물들에 대해 기록한 70열전(列傳) 등 모두 130편 526,500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지금의 사기(史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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